그랜드슬램에도 멈추는 시간이 필요하다[박준용 인앤아웃]

그랜드슬램에도 멈추는 시간이 필요하다[박준용 인앤아웃]

올해 US오픈 남자단식 8강에서 알카라스와 쉘튼은 4시간 28분의 혈투를 펼쳤고, 경기는 다음 날 새벽 3시 33분에 끝났다. 게티이미지코리아[스포츠경향 박준용 테니스 칼럼니스트(), ENA 스포츠 테니스 해설위원, 아레테컴퍼니(주) 대표] 테니스는 시간을 정해놓고 끝내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축구처럼 90분이 지나면 종료...

올해 US오픈 남자단식 8강에서 알카라스와 쉘튼은 4시간 28분의 혈투를 펼쳤고, 경기는 다음 날 새벽 3시 33분에 끝났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올해 US오픈 남자단식 8강에서 알카라스와 쉘튼은 4시간 28분의 혈투를 펼쳤고, 경기는 다음 날 새벽 3시 33분에 끝났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스포츠경향 박준용 테니스 칼럼니스트(), ENA 스포츠 테니스 해설위원, 아레테컴퍼니(주) 대표] 테니스는 시간을 정해놓고 끝내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축구처럼 90분이 지나면 종료되는 것도 아니고 농구처럼 경기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남자 그랜드슬램은 5세트 경기입니다. 한 경기가 3시간을 넘어가는 것은 흔하고 접전이 벌어지면 4시간, 5시간까지 이어집니다.

그런 스포츠에서 밤 11시에 경기를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경기가 새벽까지 이어집니다.

지난주에 끝난 US오픈 남자단식 카를로스 알카라스(스페인, 3위)와 벤 쉘튼(미국, 4위)의 8강은 밤 11시 5분에 시작됐습니다. 두 선수는 4시간 28분 동안 혈투를 펼친 끝에 다음날 새벽 3시 33분에 끝났습니다. US오픈 역사상 가장 늦게 끝난 경기였습니다.

두 선수의 투혼은 눈부셨지만 경기장 안팎의 풍경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승패를 겨루는 순간 관중들은 지하철 운행 중단 등의 이유로 코트를 빠져나갔고 텅 빈 코트에는 극소수의 관중과 지친 스태프들만이 남겨졌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경기였는지 질문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기, 선수 보호를 넘어 ‘공정성’의 문제

경기가 끝났다고 선수의 하루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경기 후 선수들은 쿨다운과 스트레칭을 해야 합니다. 물리치료와 마사지도 받아야 하고 기자회견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필요하면 도핑 검사도 받아야 합니다. 그 뒤에 식사를 하고 경기장을 빠져나와 호텔로 이동합니다.

새벽 3시 33분에 경기가 끝났다면 실제로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늦습니다.

그랜드슬램은 하루짜리 이벤트가 아닙니다. 선수들은 이틀 뒤 다시 세계 최고의 선수와 경기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수면과 회복은 단순한 개인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경기력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같은 대진표에 있는 두 선수 가운데 한 명이 오후에 경기를 마치고 정상적으로 회복한 반면 다른 한 명은 새벽까지 경기를 하고 오전에 잠자리에 들었다면 두 선수가 정말 동일한 조건에서 다음 경기를 치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지점부터 심야 경기는 단순한 선수 불편이 아니라 경기의 공정성 문제가 됩니다. 프로테니스선수협회(이하 PTPA)의 분석도 이 문제를 가볍게 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PTPA가 2018년부터 2024년까지 그랜드슬램 단식 경기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오후 7시 이후 시작된 야간 경기 비율은 2018년 전체 경기의 6.6%에서 2024년 19.8%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같은 분석에서 부상과 연결된 경기 비율도 주간 경기 4.6%, 야간 경기 5.2%로 야간 경기에서 더 높게 나타났습니다.

야간 경기가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녁 7시 또는 8시에 시작해 밤 10시나 11시에 끝나는 경기는 충분히 흥행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부상에서 복귀한 알카라스와 홈 팬들의 응원을 받은 쉘튼의 8강은 최고의 흥행 카드였지만 경기가 새벽까지 이어지면서 관중석 곳곳이 비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경기로 선수들도 지쳤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부상에서 복귀한 알카라스와 홈 팬들의 응원을 받은 쉘튼의 8강은 최고의 흥행 카드였지만 경기가 새벽까지 이어지면서 관중석 곳곳이 비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경기로 선수들도 지쳤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문제는 야간 경기가 아니라 심야 경기입니다.

밤 11시가 넘어 새로운 경기가 시작되고 그 경기가 새벽 3시, 4시까지 이어지는 순간부터 선수의 생체 리듬과 회복은 심각하게 흔들립니다. 특히, 그랜드슬램처럼 2주 동안 연속해서 경기해야 하는 대회에서는 이것이 단순한 체력 문제가 아닙니다.

대진표상 누구는 낮에 끝나고 누구는 새벽에 끝나는 구조 자체가 다음 라운드의 조건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운 상황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스포츠가 선수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누가 새벽 4시까지 더 잘 버티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좋은 테니스를 하느냐입니다.

윔블던의 커퓨(Curfew)가 던지는 질문

이 문제를 바라볼 때 흥미로운 대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윔블던입니다. 윔블던에서는 원칙적으로 밤 11시 이후 경기를 진행하지 않습니다.

경기가 끝나지 않아도 멈추고 센터코트에 지붕이 닫혀 있고 조명 시설이 설치돼 있어 밤새 경기가 가능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밤 11시까지 승부가 결정되지 않으면 무조건 다음 날 다시 경기를 이어갑니다.

2023년 앤디 머레이(영국, 은퇴)와 스테파노스 치치파스(그리스, 44위)의 2회전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머레이가 세트 스코어 2-1로 앞선 상황에서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밤 10시 39분 경기가 중단됐습니다. 밤 11시 커퓨(Curfew, 통행금지 시간)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선수는 다음 날 다시 센터코트에서 경기를 이어갔습니다.

흥미롭게도 커퓨의 출발점은 선수 보호가 아닙니다. 윔블던이 열리는 올잉글랜드클럽 주변은 주거지역입니다. 인근 주민들의 소음 문제, 경기 종료 후 대규모 관중 이동, 대중교통 운행 여건, 지역 행정을 담당하는 머튼 카운슬과의 운영 조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밤 11시 커퓨가 자리 잡았습니다.

윔블던 센터코트는 약 1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정이나 새벽에 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경기장을 빠져나온다면 인근 지역의 교통과 소음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윔블던은 지역사회와 주민의 보호를 위해 밤 11시에 멈춥니다.

바로 여기에서 묘한 역설이 생깁니다.

주민의 수면과 생활은 보호해야 하는데 ‘선수의 수면과 회복은 왜 보호하지 못하는가?’입니다.

물론 윔블던의 커퓨를 다른 그랜드슬램에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각 대회의 문화와 운영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US오픈에서 야간 경기는 최고의 상품입니다.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아서 애시 스타디움에서 세계적인 스타들이 경기하는 ‘야간 세션’은 US오픈을 상징합니다. 뉴욕 프라임타임 방송과 별도로 판매되는 야간 티켓도 대회 흥행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고 야간 경기를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윔블던이 보여주는 원칙은 분명합니다. 어떤 흥행도 무제한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밤 11시가 되면 관중이 더 보고 싶어도 방송사가 계속 중계하고 싶어도 경기를 멈춥니다. 그 기준이 지역 주민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면 선수들의 건강과 회복을 위해서도 일정한 기준을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윔블던의 커퓨(Curfew) 규정 따라 코트를 따나는 선수들과 관중들. 게티이미지코리아
윔블던의 커퓨(Curfew) 규정 따라 코트를 따나는 선수들과 관중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랜드슬램에도 ‘멈추는 시간’이 필요하다

심야 경기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해결책이 있습니다. 남자 그랜드슬램 경기를 5세트가 아닌 3세트로 줄이자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필자는 이것이 올바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차별 문제를 떠나 그랜드슬램의 5세트 경기는 테니스가 가진 독특한 가치 때문입니다.

한 선수가 두 세트를 뒤진 뒤 경기를 역전하는 과정, 네 시간 이상 이어지는 승부에서 경기 흐름을 읽고 전략을 바꾸는 과정은 5세트 테니스만이 만들 수 있는 드라마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명승부가 바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세트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문제는 경기 방식이 아닙니다. 3세트로 줄일 것이 아니라 밤 11시에 5세트 경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됩니다.

ATP와 WTA도 이미 심야 경기 문제를 인식해 지난 2024년부터 투어 대회에서는 원칙적으로 밤 11시 이후 새로운 경기가 시작되지 않도록 경기 일정 기준을 도입했습니다. 세계 테니스가 선수 보호 차원에서 심야 경기를 줄여야 한다는 방향에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가장 긴 경기가 열리는 그랜드슬램에서 더욱 명확한 기준이 필요해 보입니다. US오픈의 야간 세션 첫 경기를 지금보다 앞당기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현재보다 30분이나 1시간만 앞당겨도 뒤 경기의 시작 시간을 상당히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경기를 시작하지 않는 커퓨 도입 역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밤 11시 이후에는 새로운 경기를 시작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또는 밤 11시 30분이나 자정 이후에는 새로운 세트를 시작하지 않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윔블던처럼 경기를 무조건 중단하는 것이 최선인지, 새로운 경기만 제한하는 것이 나은지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끝날 때까지 한다’는 방식만이 유일한 답은 아닙니다.

그랜드슬램은 한 경기의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2주 동안 여러 경기를 치른 끝에 챔피언을 가려내는 대회입니다.

누군가는 오후에 경기를 끝내고 정상적으로 식사하고 충분히 수면을 취하는데 다른 선수는 새벽 4시에 경기장을 떠난다면 그것을 선수 개인의 운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테니스는 명승부를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5세트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간 경기도 없앨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수의 건강과 경기의 공정성보다 흥행이 우선되어서는 안 됩니다. 알카라스와 쉘턴이 만들어낸 새벽 3시 33분의 승부는 분명 훌륭한 경기였습니다.

하지만 좋은 경기가 반드시 좋은 시간에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윔블던에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밤 11시에 테니스를 멈춥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그랜드슬램에서도 질문해야 합니다.

선수들을 위해 몇 시에 멈출 것인가? 테니스에도 밤은 필요합니다.

출처: 스포츠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