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 or 보기] 최예림의 ‘238전 239기’가 주는 감동과 울림
녹색의 필드는 때로 잔인하리만큼 냉정하다. 타수를 줄이기 위해 수없이 클럽을 휘둘러도 단 한 타 차이로 우승컵이 타인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을 매번 목도해야 하는 스포츠가 바로 골프다. 팬들의 기대와 언론의 조명,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 속에서 수년, 혹은 수십년의 ‘우승 가뭄’을 견뎌낸 선수들이 있다. 최근 238번...

녹색의 필드는 때로 잔인하리만큼 냉정하다. 타수를 줄이기 위해 수없이 클럽을 휘둘러도 단 한 타 차이로 우승컵이 타인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을 매번 목도해야 하는 스포츠가 바로 골프다. 팬들의 기대와 언론의 조명,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 속에서 수년, 혹은 수십년의 ‘우승 가뭄’을 견뎌낸 선수들이 있다.
최근 238번의 도전과 9번의 준우승 끝에 프로 데뷔 9년 만에 드디어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최예림(사진)을 비롯해 미국프로골프(PGA)투어와 유럽 무대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자신을 증명한 토미 플리트우드(영국), 그리고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의 대표적 대기만성형 선수들인 박주영, 안송이, 장은수 등등. 이들이 버텨낸 기나긴 인고의 시간, 마침내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을 때 던진 메시지는 필드 위 동료들뿐만 아니라 삶의 필드 위에 서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감동과 울림을 준다.
KLPGA투어에서 최예림이라는 이름 앞에는 오랫동안 ‘지독한 준우승 잔혹사’라는 태그가 붙어 있었다. 꾸준히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지만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무릎을 꿇었다. 데뷔 후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우승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견뎌야 했던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침내 통산 239번째 대회(OK저축은행 읏맨오픈)에서 생애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최예림은 인터뷰에서 그간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는 “준우승을 반복하던 시절에는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고, 솔직히 골프가 너무 치기 싫었던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퍼트 향상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연습한 것이 첫 우승의 원동력이 됐다. 9년 동안 묵묵히 견뎌온 내 자신에게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고, 이제는 정말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우승은 ‘좌절의 경험이 포기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플리트우드는 세계 골프계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샷을 구사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러나 PGA투어 무대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우승과 인연이 닿지 않아 ‘우승 없는 최고 선수’라는 씁쓸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 빅 이벤트 대회에서 숱하게 ‘톱10’에 들었음에도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를 향한 의구심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프로세스를 신뢰했다.
그리고 지난해 PGA투어 플레이오프 최종전 투어 챔피언십에서 마침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인고의 세월에 마침표를 찍었다. PGA투어 134개 대회 만에 거둔 쾌거였다. 플리트우드는 경기 직후 “나는 오랫동안 PGA투어 우승자였다. 그 우승은 항상 내 마음 속에 있었고 아슬아슬한 상황도 많았지만 나는 늘 도전을 즐겼다”며 “패배와 아쉬움 뒤에도 계속 도전하고 노력한다면 결국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고백은 일시적인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과정의 철학’을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인 성공을 이끄는 열쇠임을 잘 보여준다.
최예림 이전에 KLPGA투어 역사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인물들로 박주영, 안송이, 장은수도 빼놓을 수 없다. 투어 입문 후 14년, 무려 279번째 대회 만에 첫 우승(2023년 대보 하우스디 오픈)을 차지한 박주영은 ‘엄마 골퍼’로서의 삶과 선수 생활을 병행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오랜 시간 우승이 없어 지치기도 했지만 가족과 아이가 주는 힘으로 버텼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삶의 가치를 전했다.
10년 동안 237번의 도전 끝에 2019년 ADT캡스 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승을 거둔 안송이 역시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그는 첫 우승 직후 “한국에서는 30대가 되면 노장 소리를 듣지만 30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신인왕에 오른 뒤 찾아온 긴 슬럼프와 우승 가뭄 속에서 묵묵히 샷을 다듬어 지난달 제주삼다수 마스터스에서 데뷔 10년 만의 첫 승을 거둔 장은수도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흘린 땀방울이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이한 이들의 서사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 특히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과 지속성’이라는, 그들이 온몸으로 던진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골프 투어는 매주 새로운 우승자가 나오는 치열한 서바이벌 현장이다. 남들과 비교하며 조급해지기 쉬운 환경에서 최예림과 박주영, 안송이, 장은수, 플리트우드는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했다. 빠른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과 지속적인 노력이다.
9번의 준우승을 거친 최예림과 숱한 ‘톱10’에 만족해야 했던 플리트우드에게 아쉬운 패배들은 결코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다. 챔피언이 되기 위한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약점을 보완하는 강력한 자양분이 됐다. “30대도, 아이를 둔 엄마도, 200번 넘게 실패한 선수도 해낼 수 있다”는 이들의 증명은 지금도 필드 위에서, 그리고 각자의 현장에서 묵묵히 버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음은 바로 당신 차례”라는 위로와 용기를 건넨다.
출처: 국민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