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데스티니"…서울올림픽 때 태어난 칠리치, 스승의 코트에 서다
2014년 US오픈 챔피언 마린 칠리치가 22일 서울 올림픽공원 테니스경기장에서 열린 서울오픈 기자회견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더 그라운드"데스티니(Destiny·운명)."22일 서울 올림픽공원 테니스경기장. 필자가 마린 칠리치(38·크로아티아)에게 생일과 서울올림픽의 인연을 꺼내자 돌아온 첫마디였습니다.칠리치는 1988...

"데스티니(Destiny·운명)."
22일 서울 올림픽공원 테니스경기장. 필자가 마린 칠리치(38·크로아티아)에게 생일과 서울올림픽의 인연을 꺼내자 돌아온 첫마디였습니다.
칠리치는 1988년 9월 28일 태어났습니다.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한창 뜨거웠던 때입니다. 그해 9월 17일 개막한 올림픽은 10월 2일까지 이어졌습니다. 서울이 세계의 선수들을 맞이하던 가을, 훗날 US오픈 정상에 오를 선수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의 멘토이자 전 코치인 고란 이바니세비치가 서울올림픽 출전 선수였습니다. 1971년 9월 13일생인 이바니세비치는 올림픽 개막 나흘 전 만 17세가 됐습니다. 갓 열일곱 소년이 유고슬라비아 대표로 생애 첫 올림픽을 치르던 무렵 칠리치가 세상에 나온 셈입니다. 이바니세비치는 단식 1회전에서 탈락했지만 복식에서는 슬로보단 지보이노비치와 짝을 이뤄 8강까지 올랐습니다. 4년 뒤 바르셀로나에서는 단·복식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칠리치도 스승이 열일곱 살에 서울올림픽에 출전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바니세비치는 이후 2001년 윔블던 챔피언이 됐고, 지도자로는 칠리치의 2014년 US오픈 우승을 도왔습니다. 소년 선수와 갓난아기가 스승과 제자가 되고, 38년 뒤 제자가 스승의 올림픽 코트를 처음 찾았습니다. 그가 말한 '운명'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칠리치는 25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리는 유진투자증권 서울오픈 챌린저에 출전합니다. 세계랭킹 3위까지 올랐던 메이저 챔피언이 한국을 찾은 것은 처음입니다. 이번 대회는 그의 올 시즌 마지막 무대이기도 합니다.
훈련을 위해 먼저 경험한 올림픽공원 테니스경기장은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경기장 규모에 놀랐다며 ATP 250, 나아가 ATP 500급 대회도 개최할 수 있는 곳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더 큰 국제대회가 열리면 한국 팬과 젊은 선수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다만 선수 전용 웨이트트레이닝장이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꼽았다고 임규태 서울오픈 토너먼트 디렉터는 전했습니다.
노후 시설 개선 요구가 끊이지 않는 올림픽공원 테니스경기장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문을 열어 어느덧 마흔 살이 됐습니다. 지난해 9월 WTA 500급 코리아오픈 때는 WTA 관계자가 기자회견을 열어 시설 문제를 직접 지적했습니다. 피트니스룸은 장비가 부족하고 공간도 기준에 못 미쳤습니다. 기자회견실은 비좁았고, 선수 라커룸에는 화장실이 없었습니다. 비가 내린 날에는 선수 라운지에 빗물이 새기도 했습니다. 경기장을 관리하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올해 코리아오픈을 앞두고 센터코트 관중석 등을 보수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메이저 챔피언이 짚은 웨이트장의 빈자리가 그 숙제를 다시 일깨웁니다.
한국 테니스를 향한 시선에는 오랜 교류에서 비롯된 존중이 담겼습니다. 임 디렉터와 이형택부터 정현, 권순우까지 여러 세대의 한국 선수를 기억했습니다. 직접 맞붙거나 함께 훈련하며 느낀 한국 선수들의 강점으로는 강한 의지와 뛰어난 운동 능력을 꼽았습니다.
정현과는 2018년 호주오픈에서 나란히 4강에 올랐습니다. 필자는 그해 멜버른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4강전과 결승을 현장에서 지켜봤습니다. 칠리치는 카일 에드먼드(영국)를 3-0으로 꺾고 먼저 결승에 올랐습니다. 다음 날 정현은 로저 페더러와의 준결승에서 발바닥 물집을 견디지 못하고 2세트 도중 기권했습니다. 물집 잡힌 발로 끝까지 버텨보려던 정현의 모습과, 결승에서 페더러와 5세트까지 맞서던 칠리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두 선수가 결승에서 만나는 장면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고, 우승컵은 페더러에게 돌아갔습니다.
준우승 시상대에 선 칠리치는 "내 인생 최고의 2주가 될 수도 있었다"며 아쉬움을 삼켰습니다. 그러면서도 먼저 페더러에게 축하를 건네고 호주 팬들에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그 품격 있는 소감이 경기 못지않게 기억에 남습니다.

칠리치는 정현의 선수 생활에 부상이 끼친 영향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역시 2017년 윔블던 결승에서 발 물집 탓에 페더러에게 제대로 맞서지 못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현이 다시 국가대표로 나서 동료들과 소중한 순간을 함께하는 모습에 반가움을 나타냈습니다. 한국이 정현과 권순우를 앞세워 사상 처음 데이비스컵 파이널8에 진출한 데 대해서도 놀라운 성취라고 평가하며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를 응원했습니다.
그의 격려에는 경험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칠리치는 2018년 데이비스컵 결승에서 프랑스의 뤼카 푸유를 꺾고 크로아티아의 두 번째 우승을 확정했습니다. 개인 성적을 넘어 나라 이름으로 동료들과 함께 이기는 기쁨을 아는 선수입니다.
크로아티아 테니스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자라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선수가 디노 프리즈미치입니다. 2023년 프랑스오픈 주니어 남자단식에서 우승해, 칠리치 이후 18년 만에 이 대회 정상에 오른 크로아티아 선수가 됐습니다. 올해는 세계랭킹 100위 안에 진입하고 개인 최고 70위까지 올라섰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성적만이 아닙니다. 선배의 경험이 후배에게 전달되는 과정입니다. 칠리치는 서울 기자회견에서도 젊은 선수들이 자신에게서 영감을 얻고 조언을 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프리즈미치는 지난해 ATP 인터뷰에서 칠리치와 보르나 초리치를 보며 성장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에게 매 포인트 끝까지 싸우는 자세와 점수에 관계없이 자신을 믿는 태도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자그레브에서는 칠리치와 함께 훈련했고, 언제든 조언을 구하면 기꺼이 도움을 주는 선배들이 곁에 있다는 점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크로아티아의 다음 세대는 프리즈미치 한 명에 그치지 않습니다. 마테이 도디그도 자국 ATP 투어 대회인 우마그 대회에서 기회를 얻으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대회 조직위는 올해도 도디그 등 젊은 선수들에게 본선 와일드카드를 제공했습니다. 선배의 조언과 실전 무대가 함께 다음 세대의 발판이 되는 모습입니다.
그의 관심은 크로아티아 후배들에게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대회 기간 칠리치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임 디렉터는 그를 진솔하고 테니스에 대한 애정이 큰 선수라고 소개했습니다. 칠리치가 특히 궁금해한 것은 한국 주니어 선수들이 어떻게 성장하느냐였다고 합니다.
질문은 구체적이었습니다. 어떤 국내 지도자들이 선수들과 해외 투어를 다니는지, 경험 많은 외국인 지도자가 한국 선수를 가르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니어들이 어떤 조언을 들으며 세계 무대에 도전하는지, 훈련 일정은 어떻게 짜는지, 프로와 주니어가 어떤 시스템으로 함께 훈련하는지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바니세비치에게 배운 칠리치가 이제 후배들에게 경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메이저 챔피언 한 명의 가치는 우승 기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다음 선수가 더 큰 꿈을 품게 하고, 그 꿈을 향해 가는 길을 알려주는 데도 있습니다.

이번 서울 방문에는 가족과의 시간도 담겨 있습니다. 가족이 합류하면 대회가 끝난 뒤에도 며칠 더 머물며 한국 문화와 음식을 즐길 계획입니다. 시즌 마지막 원정이 가족 모두의 서울 여행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칠리치는 입국에 앞서서도 서울의 역사와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습니다. 코트에서 한국 팬을 만나고, 코트 밖에서는 가족과 서울을 경험하려 합니다.
아이들은 그가 투어를 이어가는 소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테니스와 스포츠를 좋아하는 두 아들과 세계를 다니며 오래 기억할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아이들도 테니스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습니다. 스승에게서 받은 라켓을 이제 아들들에게 건네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엿보였습니다.
서울올림픽 때 태어난 소년이 메이저 챔피언이 돼 스승의 코트를 찾았습니다. 이제는 후배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선배이자, 아이들이 같은 코트에 서기를 꿈꾸는 아버지가 됐습니다.
칠리치가 말한 '데스티니'. 이번 가을 서울에서 그 인연의 다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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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테니스코리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