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의 감성, 골프美학] 방향 없이 부는 바람처럼, 가끔은 떠나라 그리고 비워라
이 얼마 만에 느끼는 해방감인가. 생각해 보니 여행만을 위한 여행은 십 년이 넘은 듯했다.이 홀가분한 ‘떠남’에서 전해 오는 짜릿한 전율은 마치 일탈을 꿈꾸던 도심의 늪에서 빠져나와 방향 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기분과도 같다.큰딸이 달포 전 이번 가을에는 가족 모두 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솔깃했다. 사실...

이 얼마 만에 느끼는 해방감인가. 생각해 보니 여행만을 위한 여행은 십 년이 넘은 듯했다.
이 홀가분한 ‘떠남’에서 전해 오는 짜릿한 전율은 마치 일탈을 꿈꾸던 도심의 늪에서 빠져나와 방향 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기분과도 같다.
큰딸이 달포 전 이번 가을에는 가족 모두 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솔깃했다. 사실 골프와 함께하는 여행 말고는 다녀온 기억이 까마득하다. 큰아이가 이미 한 번 다녀온 곳이라 우리 가족에게는 검증된 이상향이나 다름없었다. 다담한옥(茶談韓屋). 차와 이야기를 나누는 곳에서 보내는 하룻밤이 그려졌다.
그래, 다 떨치고 떠나자. 뭐 그리 혼자 세상을 등에 업고 바삐 사는 삶이라고, 주저하다 끝내 포기해 왔던 일상에 일침을 놓고 싶었다. 이 기회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느끼고, 치타처럼 무섭게 달려온 삶의 속도를 다운시프트(downshift)하자고 마음먹었다.
프로골퍼 샘 스니드가 “드라이버를 골프백에서 꺼내 라커룸에 남겨두고 코스로 나가 보라”고 했다. 없으면 안 될 것 같지만, 막상 드라이버가 없으면 우드와 아이언으로 좀 더 정확하게, 그리고 집중해서 라운드하게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사회가 구획해 놓은 경쟁의 속도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조금이라도 더 달리려 했다. 굼벵이를 보고 우리는 속도가 느리다고 말한다. 치타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굼벵이는 결코 느린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갈 뿐인데 인간이 느리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치타가 다른 동물보다 빠른 것은 맞지만, 빠른 만큼 금방 지치고 수명도 짧다. 이렇듯 세상에는 분명 자기만의 속도가 필요하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 거리에 있는 울산 울주군의 다담한옥으로 향했다. 다섯 시간이 걸린다는 것 역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숫자일 뿐이다. 천천히 풍경을 담아 가며 차를 몰았다.
언양에서 유명한 불고기를 먹고, 대형 산불로 타다 남은 나무를 활용해 카페를 만든 탄목원(炭木園)에서 커피를 마셨다. 불에 그을린 나무로 외벽을 마감해서인지 그 공간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죽음 없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은 없다. 내가 죽고 다시 썩어 그 자양분으로 생명이 되살아나듯, 불에 탄 자리에 들어선 카페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삶의 의미를 곱씹고 있었다.

다담한옥으로 향했다. 사람과 차보다 산과 구름, 바람이 더 웅성거리는 풍경을 뒤로하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정겨운 토담과 한옥 처마 밑 풍경소리가 먼저 우리를 반겼다. 마당에는 감나무 가지가 땅으로 내려올 듯 휘어져 있었다. 마음껏 따 가라는 말보다 먼저 장대를 가져다주는 주인장의 미소가 더없이 가을다웠다.
밤하늘에는 보석처럼 별이 박혀 있었고, 문풍지 사이를 오가는 작은 바람 소리는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꿈같은 밤을 보내고 새소리에 깨어난 아침, 초당에서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다도(茶道)까지 즐겼다. 묘한 인연이었다. 큰아이의 이름을 ‘다정(茶靜)’이라고 지었는데, 이 고요 속에서 차를 마시고 있으니 새삼 신기했다.
서둘러 간월재로 향했다. 김밥 두 줄을 사 들고 6km를 걸어 올랐다. 모든 사념이 사라지고 오로지 바람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들꽃만 눈과 귀에 들어왔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복작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이 참으로 아득했다. 왜 저 안으로만 들어가면 우리는 그리 여유가 없는 것일까. 아니, 곧 다시 사람 사는 풍경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가수 박군에게 전화가 왔다.

간월재에 있다고 하자 박군은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간월재에는 한 번도 와보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중국집 배달을 하며 생계를 꾸렸기에 간월재에 오르는 일은 사치였는지도 모르겠다. 박군은 언양의 명품 한우를 맛보고 가라며 식당까지 예약해 주었다. 예기치 못한 여행에서 따뜻한 정까지 얻어 가게 된 것이다.
이번 여행은 진정 내 삶에 쉼표를 찍어 주었다. 말 그대로 가끔은 이렇게 여행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떠나 볼 일이다.
장자가 말했듯 여행은 또 다른 스승이다. 무언가를 채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비우러 떠나는 여행이 정답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비워 낸 자리에 새로운 것들이 채워질 것이다.
앞으로는 비워지는 것에 더 익숙해지려 한다. 내일 당장 누군가가 함께 떠나자고 손을 내민다면, 방향 없이 부는 바람처럼 망설임 없이 말하리라.
“떠나라!”
글, 이종현 시인

출처: MHN스포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