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골퍼를 위한 코스는 없다 [박민영의 골프홀릭]
A: 어느 쪽이 높아?캐디: 왼쪽이 높아 보여요.A: 어느 정도?캐디: 컵 하나 정도.A: (이리저리 그린을 살펴본 뒤 어드레스를 취했다가 자세를 풀며) 오르막? 평지인가?캐디: 오르막요.A: (다시 어드레스에 들어간 지 10초쯤 지난 뒤 또 자세를 풀며) 근데, 얼마나 오르막이지?캐디: …….얼마 전에 있었던 한 동반자...

A: 어느 쪽이 높아?
캐디: 왼쪽이 높아 보여요.
A: 어느 정도?
캐디: 컵 하나 정도.
A: (이리저리 그린을 살펴본 뒤 어드레스를 취했다가 자세를 풀며) 오르막? 평지인가?
캐디: 오르막요.
A: (다시 어드레스에 들어간 지 10초쯤 지난 뒤 또 자세를 풀며) 근데, 얼마나 오르막이지?
캐디: …….
얼마 전에 있었던 한 동반자 A와 캐디 사이의 대화를 옮겨봤다. 말문이 턱 막힌 캐디의 얼굴이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오르막 경사도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그날 A의 질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당시 A가 남긴 것은 황당함과 큰 웃음뿐만 아니었다. 그린은 물론 코스 여기저기에서 그가 시간을 잡아먹은 탓에 다른 동반자들은 경기 진행에 신경을 쓰느라 플레이를 서둘러야 했고, 스코어는 기분만큼이나 엉망이 됐다.
슬로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다. 슬로 플레이에는 너무 긴 준비 과정과 어드레스, 느린 이동 이외에 경기 시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불필요한 행동도 포함된다.
요즘 주요 프로골프 투어에서는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해 슬로 플레이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1타에 큰 상금과 명예가 걸려 있다는 점 또한 사실이지만, 다른 선수들의 리듬을 깨고 스포츠로서의 속도감이나 매력을 반감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어서다. SNS에서도 호흡이 짧은 숏폼 영상이 인기를 모으는 도파민 중독의 시대에 ‘슬로 플레이가 투어를 죽인다’는 위기의식이 더 커지는 분위기다.
슬로 플레이가 프로 투어만 죽이는 것은 아니다. 아마추어 골프와 골프 관련 산업에 미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코로나19 확산 때 신규 골프 인구가 유입했다가 엔데믹 이후 빠져나가고 있는데, 특히 소위 MZ 세대의 이탈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비용 등 현실적인 문제도 영향이 있겠지만, 시간을 너무 뺏기는 게 걸림돌이라는 이야기를 주위에서도 듣게 된다. 젊은 골프 인구와 잠재 골프 인구의 감소는 골프장, 용품, 의류 등의 매출 감소와 직결된다.
골프의 특성상 ‘물리적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심리적 시간’을 줄이는 게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리적인 체감 시간을 늘리는 주범이 바로 슬로 플레이다. 플레이가 끝나도 퍼트를 한 번 더 해보느라 그린을 비워주지 않는 골퍼, 여분의 클럽이나 볼을 챙기지 않아 페어웨이와 카트를 왔다 갔다 하는 골퍼, 그린까지 턱 없이 먼 거리가 남았는데도 2온을 노리겠다며 페어웨이를 차지하고 있는 골퍼, 굿 샷보다는 인생 샷 사진 남기기에 열중인 골퍼 등 짜증 유발자들은 타인의 시간과 기분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멘탈 전문가인 정그린 그린코칭솔루션 대표는 “샷 준비에 있어 정말 필요한 행동과 불필요한 행동을 구분하도록 한다. 그렇게 행동 패턴을 가장 효율적으로 세팅한 후 그 패턴을 따르고 익숙하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통산 4승을 거둔 함정우의 “신중한 건 좋지만 오래 걸린다고 해서 신중한 건 아니다”라는 말도 새겨볼 만하다.
골프규칙 1.1은 골프게임의 정의에 대한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1.2는 모든 플레이어가 지켜야 하는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실하게 행동하고(예-규칙을 따르고, 모든 페널티를 적용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직하게 플레이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예-신속한 속도로 플레이하고…중략), 코스를 보호한다.” 슬로 플레이는 그 자체로 규칙 위반이고 비매너다.

너무 재미있어 쉽게 중독되는 것이 골프의 거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합니다. 치는 골프, 보는 골프와는 또 다른 ‘읽는 골프’의 즐거움을 함께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서울경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