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스만·홍명보와 정반대…모레노의 '디테일 축구' 한국 살릴까

클린스만·홍명보와 정반대…모레노의 '디테일 축구' 한국 살릴까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선수 경력 없이 분석관에서 스페인 사령탑까지…데이터·전술로 한계 돌파3년 전 한국행 좌절 뒤 다시 잡은 기회…6차례 A매치서 정식 감독 시험대파울루 벤투 감독 체제로 4년을 꼬박 채운 한국 축구는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루과이·가나·포르투갈과의 경쟁을...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선수 경력 없이 분석관에서 스페인 사령탑까지…데이터·전술로 한계 돌파 3년 전 한국행 좌절 뒤 다시 잡은 기회…6차례 A매치서 정식 감독 시험대

파울루 벤투 감독 체제로 4년을 꼬박 채운 한국 축구는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루과이·가나·포르투갈과의 경쟁을 뚫고 16강에 진출했다. 벤투 감독은 긴 시간 호흡을 맞춘 코치들과 함께하는 사단 체제의 중요성을 알려줬다.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전문성 높은 코치들의 디테일한 분업을 통해 선수들의 신뢰를 얻으며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 축구는 그 교훈을 걷어찼다. 북중미 월드컵까지 4년 동안엔 정반대의 길만 갔다. 이름값만 믿고 선임한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은 수준 이하의 워크에식, 자율을 빙자한 방임 운영으로 대표팀 내부를 와해시켰다. 수습을 위해 국내 감독 중 매니지먼트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홍명보 감독을 선임했지만, 그 선임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비판 속에 2년간 좌충우돌했다. 결국 48개국 체제로 확대된 월드컵에서도 토너먼트 첫 단계인 32강 진출에 실패했다.

두 감독의 잇단 실패는 단순히 월드컵 대회 하나를 망친 것이 아니다. 역대급 스쿼드를 지녔음에도 제대로 된 평가 시스템으로 이뤄지지 않은 인사, 명확한 축구 방향성과 전술적 디테일이 없는 리더십은 현대 축구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런 선택을 거듭한 한국 축구는 역행을 넘어 퇴행을 자초했고, 대대적 쇄신 요구를 받는 중이다.

북중미 월드컵 이후 신임 사령탑을 찾아야 하지만 정몽규 회장 사퇴로 인한 리더십 공백이 겹치며, 정식 감독이 아닌 임시 감독 선임으로 틀었다. 축구협회는 한 달여의 임시 감독 공개 채용을 통해 스페인 출신의 로베르토 모레노 감독에게 9월과 10월, 11월에 치르는 여섯 차례 A매치를 맡기기로 했다. 모레노 감독은 선임 과정도, 지도자로서의 커리어와 스타일도 이전과는 정반대다. 한국 축구가 다시 궤도를 바꾼다는 신호탄인 것이다.

2022년 스페인 프로축구 그라나다를 지휘할 당시 모레노 감독 ⓒEPA연합
2022년 스페인 프로축구 그라나다를 지휘할 당시 모레노 감독 ⓒEPA연합

최고의 참모지만, 팀 이끄는 1인자 리더십은 물음표

바르셀로나 출신의 1977년생 모레노 감독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선수로는 프로 레벨 근처에도 못 갔다.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10대 중반에 선수로서 경쟁력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일찌감치 지도자의 길을 택했다. 지도자 연수가 가능한 만 18세부터 공인 자격 과정을 밟았다. 만 25세에 학업, 아르바이트, 유소년팀 지도자 생활을 병행하며 최연소로 전국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바르셀로나대에서 국제통상학을 전공한 뒤 스페인 3대 금융그룹 중 하나인 카이샤뱅크에 정식 입사했다. 틈틈이 아마추어 팀과 유소년 팀을 지도하고 영상 분석을 독학한 그는 2010년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당시 바르셀로나 2군인 B팀 감독이던 루이스 엔리케(현 파리생제르맹 감독)를 만나 전력분석관을 제안받은 것이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규직 은행원을 박차고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2군 분석관으로 프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그는 엔리케 사단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 AS로마, 셀타 비고를 거쳐 2014년 FC바르셀로나 1군 사령탑이 된 엔리케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까지 올랐다. 2018년에는 스페인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엔리케 감독을 따라 다시 한번 수석코치로 동행했다. 2019년 3월 그의 인생에 가장 큰 기회가 왔다. 막내딸의 건강 문제로 스페인 대표팀을 잠시 떠나게 된 엔리케 감독의 빈자리를 메우는 감독대행을 맡게 된 것이다.

유로2020 예선을 진행 중이던 스페인은 당초 3번의 A매치만 모레노 감독에게 맡기기로 했다. 하지만 딸의 병세가 회복되지 않자 엔리케 감독은 예정 일자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사이 스웨덴까지 3대0으로 완파한 모레노 감독은 예선을 통째로 책임졌다. 결국 그는 10번의 예선 경기에서 8승 2무 무패를 기록하며 본선 진출의 임무를 완료했다.

2019년 11월 막내딸의 사망 후 마음을 추스른 엔리케 감독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모레노 감독의 운명도 엇갈린다. 당초 스페인 축구협회는 모레노 체제로 유로 본선까지 갈 준비를 했지만, 엔리케 감독이 복귀 의사를 밝히자 선회한 것. 이후 엔리케 사단에서 축출된 모레노 감독은 홀로서기에 나섰고 프랑스의 AS모나코, 스페인의 그라나다, 러시아의 소치 같은 클럽을 이끌었다.

감독으로서의 명암은 뚜렷하다. 분석관 출신답게 데이터에 기반한 세부 전술 설계 능력이 출중한 최고의 참모지만, 팀을 이끄는 1인자로서의 역량은 아쉽다는 것. 모나코 시절은 자신을 영입한 구단 수뇌부가 물러나며 반년 만에 지휘봉을 놓아 평가가 애매하지만 그라나다에서는 과도한 전술적 고집으로 인한 선수들과의 갈등으로 조기 경질됐다. 강등 위기였던 소치에 부임해서는 1년 만에 1부 리그 복귀를 이끌었지만 2025~26 시즌 10경기에서 1승1무8패를 기록하며 물러났다. 결국 감독 커리어 첫 장이 최고점이었고 이후엔 내리막길이었다.

위르겐 클린스만 전 감독, 홍명보 전 감독 ⓒ국회사진기자단
위르겐 클린스만 전 감독, 홍명보 전 감독 ⓒ국회사진기자단

김민수·정승원 등 새로운 선수 발굴에도 관심

모레노 감독은 그라나다에서 경질된 시점인 2023년 초에도 한국행을 적극적으로 원했다. 벤투 감독의 후임을 찾는 대한축구협회에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한 운영계획서를 제출하고 접촉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벤투 감독이 만든 대표팀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받기에 적합한 후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이름값에서 클린스만 감독에게 밀리고 말았다.

당시 모레노 감독이 제출한 운영계획서는 총 56페이지 분량이며, 연령별 대표부터 K리그를 아우르는 관찰을 통해 어떠한 선수를 선발해 대표팀을 운영할지에 대한 방안이 담겨 있었다. 데이터 분석에 자신 있는 강점을 활용해 당시 K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이한범·이태석·오현규·양현준 등을 활용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실제로 그 선수들은 이후 유럽에 진출했고 현재 대표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

모레노 감독이 선수로서는 프로 문턱에도 못 갔음에도 그 한계를 뚫고 지도자로 자리 잡은 것은 디테일 덕분이다. 특히 AI로 대표되는 IT 기술과 빅데이터 활용을 선도하며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로서 돌풍을 일으켰다. 테크놀로지를 적극 이용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전술 설계와 선수 활용,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훈련세션은 유럽 축구의 대세다. 과거의 경험에 기반한 감으로 버티는 감독들은 이런 흐름에 밀려 후퇴하는 중이다. 분명 대표팀의 두 전임 감독과는 대비된다.

전술적으로는 스페인, 특히 바르셀로나의 유기적인 포지션 플레이를 따르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빠른 다이렉트 플레이를 가미한다. 수적 우위를 위한 유동적인 선수 이동, 맞춤형 전술, 세부 지침에 근거한 압박과 공격 전개도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트렌디한 축구, 다양한 전술적 대안에 늘 목마름을 보인 대표팀 선수들에게는 시의적절한 감독 선임이다.

그가 정교하고 수준 높은 전술을 요구하는 만큼 선수들에게는 높은 축구 지능, 정교한 기술, 전술 이해도가 요구된다. 기존의 손흥민(LAFC), 이강인(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김민재(바이에른 뮌헨)는 여전히 중심축이 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선수 발굴도 관심사다. 모레노 감독은 스페인 대표팀의 핵심이 된 로드리, 다니 올모(이상 바르셀로나), 미켈 오야르사발(레알 소시에다드), 파비안 루이스(파리생제르맹) 등을 본격 발굴한 바 있다.

스페인 축구에 익숙한 김민수(레인저스), 이승우(전북), 그리고 기술과 기동력을 모두 갖춘 김대원(강원), 정승원(서울)이 새로 눈여겨볼 선수다. 올해 K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2007년생 미드필더 손정범(서울)도 유럽 진출이 거론될 만큼 기술과 지능이 뛰어나다. 이번 여름 유럽파에 가세한 이호재(다름슈타트), 송민규(나시오날), 김예건(즈베즈다) 발탁 여부에도 시선이 쏠린다.

두 번째 도전 끝에 한국 대표팀을 맡는 기회를 얻었지만 모레노 감독에게도 제약은 있다. 일단 이번 계약은 9월과 10월 치르는 4경기, 11월 2경기까지 총 6번의 A매치까지다. 11월 27일 종료 예정인데, 그 6경기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내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리는 아시안컵도 이끌 수 있다. 9월13일 5명의 코치와 함께 입국, 14일 천안 코리아풋볼파크에서 명단 발표 기자회견으로 공식 업무를 시작하는 모레노 감독이 위기에 빠진 한국 축구를 일으키는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출처: 시사저널